** 선물로 다크램(@Devil_lamb)님께 받은 누이라비 2차창작 소설.

** 본 글은 누이 X 라비 CP 요소를 함유하고 있습니다.

 

 


 

 

지옥

Written by 다크램 (@Devil_lamb)

 

 


 

 

"당신에게 피를 나눈 존재가 있습니다."

"......"

"곧 그 자가 찾아 갈 겁니다."

"무슨."

 

기가 차서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있었더니, 상대는 제멋대로 할 말만 하고 뿌연 안개 너머로 사라졌다. 갑작스럽게 쑤셔넣어진 말들이 안개가 꾸역꾸역 들어찬 이 공간에서 소리없이 맴돌았다.

 

"말도 안 되는……"

 

꿈을 깨려고 일부러 송곳니로 혀를 씹어보았지만 피 맛 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억지로라도 납득하지 않으면 꿈을 깨게 해 주지 않을 모양이었다. 언제나 그랬다. 모든 일을 순서대로 정해놓고 그대로 하지 않으면 목을 비틀어서라도 바로잡는다. 

신이란 그런 존재다. 이런 자리까지 올라와서 싫은 말, 찌푸린 표정조차 비추지 못하고 그를 보내버린 자신이 허무했다.

 

라비는 염라가 되기 위해 태어난 자다. 지옥의 군주, 영혼을 다스리는 엄격한 규율로써 태어난 자. 그렇다면 태어난 곳이 있어야 한다. 아무리 위대하고 압도적인 존재라도 존재를 규정하지 않으면 무와 같다. 그만한 존재를 만들기 위해서는 그만한 규정을 할 수 있는 존재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라비를 처음 본 자들은 그를 지옥 그 자체, 지옥의 분신으로써 태어난 자라 생각했다. 그만큼 지옥에 어울리는 자였고, 무거웠으며, 거대하였다. 

 

하지만 라비는 신에게서 태어났다. 라비조차 모습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신이 염라로써 낳고, 염라로써 길렀다. 그 형제는 필시 어둠이라 생각하고 자랐다. 항상 곁에 있던 것은 끝을 알 수 없는 어둠과 어스름한 달빛과 죄가 휘몰아치는 지옥의 냄새. 그런 요소만이 익숙했다.

 

그런데 이제 와 형제라니. 피를 나눈 자라니. 언제부터인지, 왜 지금인지 물어도 신은 답하지 않는다. 신이 규정한 존재에 의문을 가져도 그 대답은 공허와 같아, 끝내는 자신마저 부정당하는 기분이 든다. 

 

"어머니는 그 무엇도 명쾌하게 대답해주지 않으시는군요."

 

언제나. 그의 존재처럼 그의 질문도 어딘가 종착하면 좋을 일이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기에 신이 아니고, 신의 뜻은 자신의 뜻과 정 반대에 있다.

뿌연 안개를 뚫어져라 응시하던 라비는 끝내 숨을 크게 내쉬며 알겠다고 답했다.

 

"위대하신 염라이시여, 눈을 뜨셨나이까."

 

순식간에 안개가 걷히고 익숙한 지옥의 냄새가 풍겼다. 결코 밝지 않은 지옥의 달이 막 뜨기 시작한 시각. 라비는 침상에서 일어났다. 

 

"지옥같은 하루로군." 

"그야 지옥이니까요."

 

복도 끝에서 라비의 행차를 기다리던 신입 저승사자 레드가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라비는 못 들은 척 지나쳤다. 



어머니는 희뿌연 안개같은 자다. 라비의 기억에서는 항상 그랬다. 신은 제멋대로 밝아지고 어두워지며 정면으로 보았어도 금새 형태를 잊어버린다. 그런데도 라비는 흑과 백을 반드시 나누는 자로 자라야 했고, 상벌을 정확히 내려야 했으며 명확한 대답만을 뱉어야 했다. 생과 사를 가르는 순간이 희미할 수는 없으니.

모순이었다. 불가사의에서 태어난 판결이었다. 그래서 라비는 스스로의 존재마저 모순이라 생각한 시기도 있었다. 

하지만 별과 같이 많은 인간이 라비의, 염라의 판결을 기다리고 있었다. 깊은 고민을 하기 전에 행동할 시간도 부족했다. 그래서 모순도 잊었다.

 

지금에 다다라서야 형제.



"죄인은 무간지옥으로 끌고가라."

"염라대왕님, 제발 선처를…!"

"닥치거라! 감히 염라대왕의 판결에 토를 달 셈이냐!"

 

오늘따라 울부짖으며 끌려가는 혼이 많다. 항상 비명이 들리지만, 특히 진절머리가 나는 날이다. 라비는 머리를 짚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쉬고 다시 판결을 내리도록 하지."

"받들겠나이다."

 

호위도 없이 휘적휘적 복도를 따라 걸었다. 툭, 투둑 이질적인 소리가 들렸다. 의아함에 창을 열어보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

 

라비는 손을 뻗어 물방울을 조금 담았다. 고인 물방울 색이 투명하니 정말 비였다. 옷깃이 젖는 것도 잊고 정신없이 비를 바라보았다. 

지옥에 비가 오는 건 드문 일이다. 너무 깊어 지상에 비가 내려도 닿지 않는 까닭이다. 하늘, 구름, 지옥에 존재하는 모든 요소는 오로지 죄인을 처벌하기 위해 존재하기에 지상의 것과는 다르게 작용한다. 피는 내려도 비는 내리지 않는다. 비는 비릿한 냄새도, 끈적한 감촉도, 색도 없다. 

손바닥에 빗방울이 부딪혀 제멋대로 튀어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영문도 모른 채 마음이 들떴다.

 

'왜일까.'

 

차갑고 투명한 비의 감촉을 그저 느끼다, 라비는 깨달았다. 비가 반가운 이유.

 

"그러다 옷이 다 젖으시겠어요."

 

그 순간이었다. 빈 복도 어딘가에서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누구냐."

 

자세를 바꾸지 않고 라비가 낮게 말했다. 하지만 이내 머릿속을 번쩍 스치는 생각에 질문은 빛을 바랬다.

 

"처음 뵙겠어요, 오라버니. 누이라고 합니다."

 

복도를 덮은 그림자를 걷어내고 그가 다가왔다. 햇살같은 미소를 얼굴에 띄우고.

어머니가 말한 '피를 나눈 존재' 였다.



"오라버니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그 어머니가 내 이야기를 했다고?"

"제가 궁금해 했거든요. 매일 오라버니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죠."

 

다과를 가운데 두고 둥근 탁자에 마주앉은 둘 사이에 잔잔한 대화가 흘렀다. 목소리가 높아지는 일은 없었지만 대화거리지는 끊이지 않았다. 

라비는 말이 없는 편이 아니었다. 염라로서의 일이 아니더라도 사자들에게 가끔 농담도 던질 줄 알았다. 그래도 이런 대화는 처음이었다.

평범한 말을 주고받으며 위안을 얻는 대화는. 이 기분은 아직 장확히 정의할 수 없었고, 지옥에서 결코 얻을 수 없는 감각이었다. 오로지 같은 피를 나눈 자만이 줄 수 있는 감각. 지상에서는 가족이라 불릴 자만이.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네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벌써?"

 

생각하기도 전에 튀어나온 말에 라비도 스스로 놀라 입을 냉큼 다물었다. 누이는 그 모습을 보고 작게 소리내어 웃었다.

 

"또 올게요. 될 수 있으면 빨리."

 

라비도 그 말에 약간 웃었다. 아직 어리고 여린 누이는 빠르게 올 수 있더라도, 염라인 자신은 만나주지 못할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사정은 생각도 않고 오라버니가 아쉬워할까 빨리 오겠다 말하며 일어나는 누이가 귀여웠다.

 

"그래, 빨리 오거라."

 

올 때 처럼 활짝 웃는 누이의 모습이 빗방울처럼 반짝거렸다. 그런 순간조차 소중하게 느껴졌다.

 

가족.

라비는 가족이라는 단어를 평생 써 본 적 없었다. 하지만 그 단어만큼 지금 절실히 와닿는 단어는 또 없었다. 그 누가 얼굴조차 확실히 그릴 수 없는 어머니와, 의문도 가질 수 없는 규율에게 가족이라는 말을 붙일까. 물론 억지로 붙였다면 그것 또한 '신'이 정한 것이기에 강제로 수긍하겠지만 '어머니'는 라비를 가족이라 부른 적이 없었다. 하여 그 단어를 구태여 쓰지 않았다.

하지만 누이는 달랐다.

어머니가 규정했다. '피를 나눈 자' 이다. 피를 나눴다면 가족이다. 

 

"가족."

 

낮은 목소리가 텅 빈 공기를 갈랐다. 그 모양이 제법 좋았다. 



라비는 신에게서 나온 하나의 힘이다. 그래서 염라가 되기 이전에도 어둠을 계승할 씨앗으로 역할하고 있었다. 존재에 대해 고민할 틈도 없이 존재가 결정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이 심판하는 수 많은 존재. 신이 아닌 자들. 완전한 규율이 된 자는 완전하지 못해 심판받고, 울부짖는 이를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라비 옆에서 손과 발이 되는 사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라비는 자연스레 그들의 사령탑으로서 행동하고 있지만 그들 역시 라비의 지시를 받아야만 움직인다. 심지어 라비의 명을 거부할 때도 종종 있다. 

 

완전을 거스르는 것은 불완전이다. 그렇게 태어났으니 완전한 존재에게 심판을 받고 명령을 받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라비는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았다. 완전하지만 오직 하나이다. 소수는 다수에게 이길 수 없다. 절대적인 자는 곧 절대적인 외로움도 함께 품고 있었다는 사실이 라비의 밤을 길어지게 했다. 

완전한 외로움은 그 누구도 메울 수 없는 공허다.

 

“대왕님 요즘 좀 기분 좋아보이지 않아요?”

“한눈 팔지 말고 여기 서류나 갖다 놓으시게.”

“아니, 진짜로! 땡땡이 치려고 하는 소리가 아니라니까요?”

 

레드의 상사인 사자 마스터 캣이 레드 머리를 두루마리로 툭, 치자 레드가 투덜거리며 두루마리를 받아들었다.

 

“좀, 봐봐요. 원래 대왕님은 미간에 주름이 쭉쭉 나있다구요. 근데 요즘은 평평하잖아요.”

“흠.”

 

캣이 코웃음을 치며 들은척도 하지 않자, 레드가 두루마리를 내팽개치고 탁자 위의 종이와 붓을 냉큼 들었다. 

 

“진짜! 이것 좀 보라고요. 입도! 입도 원래 이렇게 쭉쭉 쳐지게 하고 다녔잖아요? 근데 요즘은 이렇다고요! 게다가 가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더니 요즘은 가끔 하늘을 보고 미소를 짓기도 하고!”

 

레드가 먹을 휘갈겨 그린 종이 위, 이상하게 일그러진 라비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던 캣이 수염을 쓱쓱 만지작거렸다.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런 것 같은 게 아니라 그렇다구요!”

 

지옥불에 걸어들어가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던 대왕님이,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며 종알종알 조잘대는 소리가 들린다. 간간히 캣의 '흐음' 하는 소리가 반주처럼 어우러진다. 라비는 조용히 몸을 돌렸다.

 

'좋아 보인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단지 확신할 수 없었을 뿐. 자신의 삶이 좋고 나쁜지, 스스로 판단해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사자들이 저렇게 떠들 정도면 확실했다. 

 

'누이가… 있어서.'

 

자신과 같은 존재가 하나 더 있어서. 자신의 공허를 알아 줄 사람이 있어서. 라비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새까만 하늘에도 어쩐지 웃음이 났다. 

 

"비가 올 모양이군."

 

라비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누이는 아주 가끔 나타났다. 잊을 만큼 멀지 않았고, 지겨울 만큼 가깝지도 않게. 문득 그리워 질 때 비와 함께 찾아왔다. 

 

"이상하구나."

"무엇이 말인가요, 오라버니?"

"네가 오는 시간이."

 

안뜰이 보이는 마루에 나란히 앉은 남매가 서로 마주보았다. 잠시 말이 없는 틈에 빗방울이 차가운 돌바닥에 무수히 달려들었다. 누이는 금빛 눈동자를 감추며 웃었다. 

 

"하나도 이상하지 않아요, 오라버니."

"아니, 이 지옥은 항상 바쁘다. 그런데 네가 올 때만 짬이 나니, 이상한 우연이 아니냐."

 

누이가 라비의 팔을 툭, 치며 꺄르르 웃었다.

 

"그런 뜻이었나요? 그럴 수도 있죠. 오라버니도 참."

 

라비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따라 웃었다.

 

"그럼 다른 뜻이 있느냐?"

 

누이가 살며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요. 다른 게 이상할 수도 있죠."

 

라비의 고개가 자연스럽게 위를 향했다.

 

"제가 여기 오는 행위라던가요."

 

누이의 눈동자가 하늘에 뜬 달 만큼이나 밝게 빛났다. 아래를 향하는 누이의 미소에 라비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생각도 사라졌다. 빗방울 소리가 세차게 두 사람의 웃음소리를 지웠다.



그로부터 또 아련한 시간이 지난 어느날이었다. 라비는 명부를 뒤적이던 도중 우연히 한 날 한 시에 나란히 저승으로 오게 될 형제의 이름을 보았다. 그리고는 조용히 사자 캣을 불러 명했다.

 

"형제란 어떤 존재인지 물어라. 그리고 내게 보고하도록."

"형제… 입니까?"

 

캣의 동공이 약간 가늘어졌다. 라비는 빠르게 덧붙였다.

 

"전처럼 살려달라는 애원에 넘어가도 이번만큼은 추궁하지 않겠다. 다만 대답은 반드시 가지고 돌아오라."

"받들겠나이다."

 

캣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물러났다. 꼬리 끝이 슬렁슬렁 움직이는 걸로 봐서는 이번에도 명부에 적힌 몇 명이 빠질 것이다. 약간 골치가 아파지겠지만, 지금은 그 대답이 더 중요했다. 처음으로 사적인 것을 일에 끌어들인 탓인지 심장박동이 조금 빨라졌다. 그래도 라비는 태연하게 업무를 이어나갔다. 애써 평소처럼. 

 

"염라이시여, 지금 돌아왔나이다."

 

캣이 죄인을 감옥에 넘기고 돌아온 시각은 라비가 막 판결을 마쳤을 때였다. 

 

"내가 말 한 것은 들었느냐."

 

캣이 고개를 숙였다. 

 

"모호한 대답이라 대왕께서 만족하지 못하시리라 생각하지만, 이 이상 물어도 같은 대답만 했기에 보고를 드리겠나이다."

 

라비가 고개를 까딱이자 캣이 품 속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꺼내 펼쳐 읽기 시작했다.

 

"형제는 다투는 자로, 같은 것을 향해 손을 뻗는 자입니다. 형제는 약탈하는 자로, 내 것을 호시탐탐 노리는 자입니다. 형제는 반골인 자로, 자신의 위치에 만족하지 못하고 기회를 엿보는 자입니다."

 

캣이 입을 다물자, 라비는 숨기지 않고 한숨을 뱉어냈다. '형제'로 규정된 자들이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그 모습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형제에게 살해당한 이도 저승으로 왔고, 형제를 속이고 배신하여 죄인이 된 자도 있었다. 

그래도 궁금했다. 형제를 처음 가져봤기에, 그래서 항상 생각하기에. 더 많은 '형제'가 궁금했다. 하지만 불완전한 자들은 어김없이 불완전한 채일 뿐이었다.

 

"됐다. 그만…"

"하오나 저승에 가까워졌을 때, 그들은 이렇게 말하였나이다."

 

캣이 두루마리를 다시 읽어나갔다.

 

"하지만 형제는 유일한 아군입니다. 형제는 다리를 잃었을 때 다리가 되어주는 자입니다. 형제는 나의 적과 손을 잡지 않는 자이며, 때로 함께 싸워주는 자입니다. 말년에는 의지하는 자로, 결국 형제는 힘입니다. 이해하지 못하면 날을 잡는 것이고, 비로소 이해할 때 자루를 잡는 것입니다."

 

캣이 두루마리를 다시 접어 라비 앞의 책상에 올렸다. 라비는 잠시 생각하더니, 캣에게 수고하였다고 말했다. 캣은 고개를 숙이며 물러나갔다.

 

불완전한 모습이지만 그렇기에 조금씩 달라진다. 분명 모호한 대답이지만 그 안에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라비는 형제를 얻은 후에야 처음으로 불완전한 이를 이해하게 되었다. 

 

이때 라비는 제가 느낀 것을 모두 누이와 나눠야겠다고 생각하며, 환하게 웃는 누이의 웃는 모습을 떠올렸다.



하지만 다시 비와 찾아 온 누이는 라비의 생각과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오라버니는 왜 그 대답이 마음에 드셨나요?"

 

평소의 따뜻함과 다른 미소였다. 사그라드는 촛불 같이 잔잔한 미소. 라비는 조금 의아해하며 말을 받았다.

 

"마음에 들었다기 보다는……"

 

누이는 고개를 저었다.

 

"오라버니, 제게 말했다는 것이 이미 그들의 대답에 동화되었다는 증거에요."

"동화되다니?"

 

누이는 고개를 살며시 끄덕였다.

 

"마음에 들어온 말은 사람을 쉽게 물들여 버립니다."

 

누이는 손을 뻗어 라비의 볼에 대었다. 라비는 왜 그토록 상냥하던 누이가 이런 표정을 짓고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 그저 가만히 누이를 바라보았다.

 

"오라버니……"

 

누이는 천천히 라비에게 다가갔다. 서로의 눈동자가 하나로 합쳐질 듯 가까워졌다.

 

"역시 오라버니는 나약하군요."

 

그 말에 라비가 숨을 멈췄다. 

 

"뭐…?"

 

누이의 금빛 눈동자가 당황하여 굳어버린 라비를 꿰뚫었다.

 

"불완전한 자들의 왕은 불완전할 수 밖에 없다. 어머니가 말씀하신 대로, 오라버니는 그들에게 동화되고 있습니다."

 

라비의 멈췄던 호흡이 서서히 가빠졌다.

 

"왜 저들을 이해하려 하시나요? 신에게서 태어난 자가, 왜 미물의 말에 귀를 기울이나요? 심판하는 존재가 왜 비명에 잠을 이루지 못하나요? 오라버니는 생각해 본 적 있으신가요?"

 

누이는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하지만 라비는 그 미소가 결코 상냥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라비는 가쁜 호흡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안타까워요. 하지만 그렇기에 사랑스럽죠. 오라버니, 불완전한 것을 만든 후에야 비로소 완전한 것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건 한 쌍과 같죠."

 

불완전한 것을 심판하기에 완전하다. 라비는 줄곧 그렇게 생각했다.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자신은 염라가 되기 위해 태어난 자다. 염라는 지옥의 군주이다. 하지만 그 지옥은 불완전한 자가 당도하는 곳이다. 라비는 태어난 직후부터 지옥에 있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오라버니. 제가 있으니까요."

 

불완전한 모습조차 껴안아주는 것이 완전한 자의 역할이니까요. 라며 누이가 라비를 끌어안았다. 몸이 세차게 떨리고 있었다. 어쩌면 울고 있는 지도 몰랐다. 이내 비가 그치고 모든 것이 사라졌다. 라비 혼자만이 복도에 남아 소리없이 절규했다.



옥황상제가 지옥에 행차한다는 소식은 얼마 지나지 않아 들려왔다. 라비는 모든 것을 안다는 듯 조용히 준비하는 사자들을 바라보았다. 

 

"그런 거였군."

"송구하옵니다, 대왕이시여. 잘 듣지 못하였나이다."

"그냥 혼잣말이다."

 

사자가 고개를 숙이고 뒤로 물러났다. '이 곳에 오는 행위' 가 이상하다고 했던 말이 이제야 귀에 들어왔다. 

피를 나눈 자. 형제. 라비는 들떠있던 자신의 모습에 웃음이 났다. 비로소 불완전한 자신을 똑바로 마주하니, 그제야 지옥에 완전히 동화되었다.

 

'그래도 하나는 맞추지 않았는가. 염라는 상제의 검이 될 테니.'

 

지옥의 하늘이 갈라지고, 곧 찬란한 빛이 쏟아져 내릴 것이다. 만물을 자라게 하는 축복이 이번에는 모습을 숨기지 않고 금빛으로 쏟아져 내릴 것이다. 그리고 말하겠지.

 

"오랜만입니다, 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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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관련 TMI

좋아하는 글이라 받은게 기뻐서 삽화까지 그려봤습니다.

글 분위기를 망칠까봐 글은 접어두기..

 

 

누이가 초반에 지옥에 올때는

앙큼하게도 옥황상제 옷이 아니었을테니까 :)

 

너무 화려한 복식 말고

출처를 알 수 없는 느낌이 나도록..

로드스킨이랑 범의후예 스킨을 살짝 섞어서 그렸습니다.

 

섞은거라고 하기에도 애매하긴하죠

내맘대로 보이는대로 그린거니까 (..) ㅋㅋㅋㅋㅋ

 

 

 

사실 염라께서 소매가 젖는것도 모르고 비를 만지시는거나

누이가 옷이 다 젖겠다고 말하는 그런 디테일이 좋은데

삽화를 그리고보니 전혀 젖을일이 없어보이잖아...?!

잘못 그려놓고 이제와서 아쉽네요.. 흑흑

 

 

그게 살짝 아쉬워서 비에 푹 적셔드림 (약후방) ▼

 

 

이건 이제 라비도 아니네요 (..) 같은 느낌의 팬아트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염라비를 잘생기게 그리고 싶은데 정말.. 어렵네요...

 

하 누이상제가 염라비를 한입에 꿀꺽

씹고뜯고맛보고즐기는 고수위 외전 없냐고요 ㅠㅠ

이렇게 잘쓰는데... 야한거 왜 안써줘...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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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은 양지에 경배하고

Written by 다크램 (@Devil_lamb)


 


 

 

 

 

'하늘에 오른 오누이는 각각 해와 달이 되었으나, 누이가 밤이 무섭다 하니 오라비와 바꾸어 해가 되었다.'

 

'오라비와 바꾸어 해가 되었다.'

 

"누이, 무슨 일 있나요? 하루종일 책을 붙잡고."

"어머니……"

 

방 안에 오도카니 앉아있던 누이는 '해와 달' 동화책을 어머니 호랑이 산신 쪽으로 내밀었다. 

 

"이 대목이 자꾸 마음에 걸려서요."

"이건……"

 

누이가 짚은 부분은 해와 달 동화의 마지막 장면인, 오라비가 어둠을 무서워하는 누이를 위해 역할을 바꾸어 주는 부분이었다. 누이는 이렇게 해가 되고, 오라비는 달이 되었다. 

 

"이 대목의 어떤 점이 마음에 걸리나요?"

"어머니께서 전에 말씀해 주셨지요. 모든 이야기는 정해진 운명대로 흘러간다고."

"네, 맞아요. 모든 이야기에는 정해진 운명이 있고, 그 운명을 따라 걸어야만 모든 결말에 도달하게 됩니다. 누이가 태양의 힘을 계승한 것도 그 결말이죠."

"오라버니가 달의 힘을 바꿔 준 것도 정해진 운명이죠?"

"맞아요. 태초부터 라비는 달의 힘을 계승할 운명이었어요. 두려워하는 누이를 위해 태양을 전해주는 것 자체가 라비의 운명이죠. 반복되는 운명, 이야기 속에서 누이를 외면히고 태양을 가져간 적도 있었지만 결국 올바르게 힘을 계승하지 못했죠."

 

어머니의 부드럽고 차가운 말을 듣고, 누이는 고개를 숙였다.

 

"......왜 그러죠, 누이? 라비를 걱정하고 있나요?"

"걱정……"

 

누이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어머니, 저는 오라버니가 걱정되어요. 왜냐하면……"

 

누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스매시레전드가 개최된 후, 움브라는 경기장 뿐만 아니라 시놉시티 이곳저곳에서 출몰하며 테러를 일으켰다. 마치 정해졌던 이야기인 것 처럼, 동화 속 악당의 모습을 충실히 따르는 것 처럼. 

 라비도 그 중 한명으로, 주로 어둠을 타고 다가와 시놉시티 주민들을 홀려 밤새 씨름을 시키거나 싸움을 걸어 탈진하게 했다. 가끔 음식점에 들어가 행패를 부리기도 했다. 

 누이는 라비에 대한 소문들을 그저 스쳐가는 바람처럼 듣고 흘렸다. 믿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경기장에서 라비의 모습을 몇 번이나 마주했기 때문에, 자신의 기억 속 라비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욱 마음을 쓰지 않으려 했다. 

 

 "누이, 또 햇볓 쬐고 있는 거야?"

 "안녕, 신디."

 

 벤치에 누워있다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에 살며시 눈을 뜬 누이가 웃으며 신디에게 인사를 건넸다. 신디와 피터, 그리고 스노우는 누이에게 처음 생긴 또래 친구였다. 어머니나 라비와 비교했을 때 함께한 시간은 짧지만, 그런 비교가 이상할 정도로 소중한 마음이 들었다. 

 

 "오늘 배달은 다 끝난거야?"

 "아직, 이제 앨리스한테 가는 택배만 남아서, 잠깐 쉬었다 가려고. 마침 너도 보였고."

 

신디는 웃으며 누이 옆에 앉았다. 

 

 "다음 경기 일정이 나왔어. 난 이번에도 피터랑 앨리스랑 한 팀인데, 누이 너는?"

 "아 나는……"

 

 누이는 마스터 캣에게서 전달받은 대전표를 떠올렸다.

 

 "......나도 평소랑 똑같아. 마스터 캣 삼촌이랑……"

 "그렇구나. 또 전처럼 같은 팀이면 좋겠는데."

 "응. 나도 또 신디랑 피터와 함께 싸우고 싶어."

 

 신디는 좋아, 좋아. 하며 가볍게 웃음을 지었다. 

 

 "대전 상대는 봤어? 난 이번에 후크랑, 아! 사기꾼 잭오도 있었어. 앨리스가 아주 수리도 못 할 정도로 박살을 내주겠다며 벼르고 있더라."

 

 대전표를 건네받았을 때, 마스터 캣이 누이에게 했던 말이 생각났다.

 

 '감정을 마주하는 일은 어렵지만, 언젠가는 꼭 필요한 일이란다.'

 

 누이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말을 꺼낸 이유는 알 것 같았다.

 

 "누이 너는? 대전 상대 누구야?"

 "......움브라 팀."

 "뭐? 위치퀸이 나와?"

 "아니, 이번에 새로 참가 신청을 한 몰리라는 분과, 볼프강 씨, 그리고……"

 

 라비. 라비의 이름이 있었다. 대전표를 확인 때 부터 그 이름만 눈에 들어왔다.

 

 "그래? 힘들겠네…… 그치만 넌 강하니까, 이번에도 이길 거야! 시원하게 이기고, 같이 아이스크림 먹으러 가자! 도원향에서 엄청 맛있는 복숭아 아이스크림을 판대."

 "그거 맛있겠네! 꼭 같이 가고 싶어."

 

 이제 가봐야겠다며 일어서는 신디와 함께, 누이도 벤치에서 일어섰다. 곧 노을이 질 것 같았다.



 어둠 속에 달이 걸렸다. 하지만 달은 아무것도 비추지 못하고 새카만 공허 속에 그저 차갑게 걸쳐있다.

누이는 그 달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바라보기에 빛나는 것인지, 원래 그렇게 밝아야 했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조금씩 어둠에 숨어드는 달빛을 그저 안타깝게 여길 수 밖에. 

 

'바꾸어 해가 되었다……'

 

 곧 달은 어둠 속으로 완전히 숨어들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누이는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라버니……"

 

 짧은 꿈은 허무하고도 깊었다. 누이는 창 밖에서 새어들어오는 달빛이 아쉬워 창문을 열었다. 한 밤 중이라 그런지 어둠은 더욱 깊었다.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누이는 그 어둠을 응시하며 라비를 떠올렸다.



 운명이 정했던 이야기가 모두 무너진 후, 라비를 다시 만난 곳은 스매시레전드 대회였다. 개회식에서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어 다가갈 수 없었다. 그래도 거기 분명히 라비가 있음에 누이의 심장이 뛰었다. 말 한 마디 걸지도 못하고 떨어졌지만, 그래도 기뻤다. 대회에 참가하다 보면 분명히 만날 테니까. 

 그리고 정말로 얼마 지나지 않아 대전 상대로 라비를 만날 수 있었다. 

 

 "오라버니…!"

 

 첫 재회때의 종목은 점령전이었다. 표시된 장소를 먼저 차지하는 팀의 승리였 하지만 누이는 그런 것 보다 눈 앞에 보이는 라비가 더 간절했다. 

 

 "하……"

 

 강한 빛처럼 자신에게로 곧장 뛰어오는 누이를 보고, 라비는 잠시 자세를 흐트리는가 싶더니 입꼬리를 올렸다.

 

 "...여전히 겁도 없이 다가오는구나!"

 

 라비에게서 검은 손길이 뻗어나와 누이를 잡아챘다. 그저 라비만 보고 달려가던 누이에게 피할 틈은 없었다. 빠르게 끌려가는 도중, 누이는 라비의 얼굴을 보았다. 변해버린 눈, 표정, 머리카락. 누이와 함께 웃어주던 라비의 얼굴이 아니었다. 

 

 "제가… 왜 오라버니를 두려워 해야 하나요?"

 

 하지만 라비였다. 모습이 변했어도 그토록 그리던 자신의 반쪽이다. 누이는 라비에게 이끌려 가까이 다가간 순간 라비를 껴안았다. 라비의 몸이 경직되는 찰나를 느꼈다.

 

 "큭!!"

 

 다음 순간 누이는 약간의 통증과 함께 하늘로 떠올랐다. 새파란 하늘이 눈 한 가득 담겼다. 

 

 꼭 껴안으면 부드럽게 감싸 안아주던 상냥한 손길은 거기에 없었다. 대신 거칠게 자신을 밀쳐내던 어둠만이 있었을 뿐. 공중에 높이 떠올라, 누이는 눈을 잠깐 감았다. 크게 아픈 건 아니었다. 다만 처음이었다. 라비가 자신을 밀쳐낸 것이. 자신을 밀어내는 마음에 마주한 것이. 

 충격 없이 바닥에 내려앉아 눈을 뜨니, 라비는 다른 이를 상대하러 달려가는 중이었다. 

 

 "오라버니!"

 

 누이는 라비를 크게 부르며 빛을 뻗었다. 라비의 몸이 빛에 걸려 누이 쪽으로 당겨졌다.

 

 "이게…!"

 "오라버니, 어째서 저를 피하시죠?"

 

 누이는 자신에게로 당겨지는 라비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오라버니는……"

"누이!"

 

찰나였다. 차마 맺지 못한 목소리가 어둠에 잠겼고, 마스터 캣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이후 누이의 시야는 라비가 뻗어온 검은 기운에 휩싸여 가려졌다. 어둠에 잠기면서도, 그래도 누이는 생각했다.

 

'오라버니의 손길이야.'




"누이, 다음부터는 꼭 침대에서 주무시오. 창틀에 엎어져서 잤다고 하면 누님께 내가 혼나니 말이오. 아니면 혹시 누이도 고양이로서 살아갈 결심이 든 것이오?"

"놀라게 해 드려 죄송해요……"

 

누이가 라비와의 재회를 생각하다 그대로 잠이 든 바람에, 아침에 현자회의 숙소는 아주 난리였다. 열린 창틀에 몸이 반쯤 걸려있는 누이를 보고, 누이를 깨우러 와 준 안드로이드들이 에러 메시지를 사방팔방 띄우며 호들갑을 떨었던 것이다. 

이 에러 메시지는 곧 7D로 들어갔고, 밤새 보안 모니터를 보며 졸던 로빈이 화들짝 놀라 비상 버튼을 눌렀으며, 마침 새벽 수련을 하고 돌아오던 마스터 캣은 숙소에 울리는 경보음으로 온 몸에 털이 곤두서 칼을 빼 들었고, 곧 문을 부수며 들이닥친 로빈과 스노우가 누이와 마스터 캣을 번갈아 보며 경악했다.

 

곧 누이가 눈을 비비며 일어나 금방 상황이 정리되었지만, 아직까지 마스터 캣의 등털은 삐죽 서 있었다. 

 

"로빈 씨는 일어나는 저를 보고 기절해버렸고, 스노우한테도 혼났고, 삼촌도 잘못하면 잡혀가게 할 뻔 했네요."

 

누이가 울적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마스터 캣이 폭신하고 따끈한 손을 누이의 머리에 얹어주었다.

 

"일부러 한 일도 아니지 않소. 다음부터 그러지 않으면 되는 것이오."

"그래도, 그래도요. 저 때문에……"

 

순간 누이는 저 때문에, 라는 말이 이상하게 걸려 입을 다물었다. 마스터 캣은 아무 말 없이 폭신폭신 누이의 머리를 두드려 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들 괜찮다고 했으니 이제 잊어버리시오. 게다가 생각해 보면 재미있는 사건이지 않소. 슬슬 경기장으로 갈 시간이오."

 

마스터 캣의 골골거리는 웃음소리를 보며 누이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나 때문에.  그래 전에도 그런 생각을 했어.'

 

정확히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분명 누이는 지금과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무엇 때문인지는 안개 속에 가려진 것 처럼 뿌옇게 기억나지 않지만, 어쩐지 그리운 감정 같기도 했다. 

 

'됐어, 잊자. 오늘은 오라버니를 만나는 날.'

 

사소한 감정에 매달릴 여유는 없었다. 그토록 고대하던, 라비와 만나는 날이었기에.

 

화려한 팻말을 따라 환호성과 함께 포탈을 통과하면 눈부신 개막 알림 표시와 함께 경기가 시작된다. 

첫 재회때와 같이, 이번 경기도 점령전. 경기장 가운데 표시된 부분을 팀 컬러로 동기화시키면 이기는 게임이다. 상대방이 차지하지 못하게 지키고, 쫓아내는 단순한 싸움이다.

 

누이는 이런 싸움이 싫었다. 점령전 뿐만 아니라 다른 경기도. 다투고, 욕을 하고, 치고 받는 것이 싫었다.

 

"그러니까 빨리 끝내 드릴게요, 오라버니."

 

반대편에 서 있는 라비를 향해 중얼거렸다. 같은 팀인 마스터 캣과 브릭은 듣지 못한 듯 점령지를 향해 달려갔다. 

누이도 그 뒤를 따라 달리며 손을 뻗었다. 점령지 한 가운데에 빛 기둥이 내리쳤다. 달려오던 라비의 팀이 움찔, 하며 뒤로 물러났다. 

누이는 싸움을 싫어했다. 하지만 그건 결코 약하다는 뜻이 아니다. 강하기 때문에 싸움을 싫어하고, 그만큼 빠르게 제압할 수 있다.

누이는 그런 사람이었다.

 

"또 경기장에서 만나다니, 재밌구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누이의 발 검은 기둥이 솟구쳤다. 누이는 일부러 그 기둥에 맞으며 공중으로 떠올랐다. 

 

"오라버니."

 

공중에 떠오르자 보이는 풍경은 어젯밤부터 그렇게 그리던 눈동자. 몇 번 경기장에서 마주친 후 부터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는 누이의 오빠였다.

라비가 주먹을 뻗기 직전, 누이의 주변에 빛의 구가 퍼져나가 라비를 튕겨냈다. 

 

"좋아, 덤벼봐라! 좀 더 즐겁게 해 보라고!"

"......"

 

다른 때 같았으면 상냥한 오라버니로 돌아와달라고 대답했겠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지난 밤의 꿈. 그리고 희뿌연 감각. 누이는 입을 꾹 다물고 경기에 집중했다.




"큭, 이게…!"

 

쿵, 하고 큰 소리가 나며 라비의 몸이 바닥에 내리꽂혔다. 경기중인 레전드들에게는 들리지 않았지만, 관중들은 그 모습을 보며 '햇님의 은혜'라며 환호를 보냈다. 어둠을 제압하는 누이의 빛은 그야말로 해의 축복으로 보였고, 그런 힘을 쓰는 누이는 시놉시티 시민들에게는 경외의 대상이 되어갔다. 아주 자연스럽게. 

 

"우습구나, 그렇게 약한 네가 나한테 맞설 수 있다는 게!"

 

라비의 머리에 남은 HP양이 일렁이며 표시되었다. 툭 치면 리타이어될 정도였다. 분명 라비는 허세를 부리는 중이다. 하늘에 잠시 떠올랐던 누이는 라비에게로 천천히 내려갔다. 빛이 라비의 얼굴에 한 가득 드리웠다.

라비는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주먹을 꽉 쥐고 누이가 가까이 다가오는 순간을 보고 있었다. 눈이 부시다 못해 멀 정도였지만, 그래도 라비는 어둠이기에 빛의 바로 옆에 머물 수 밖에 없었다.

 

"약하다고 하셨죠?"

"뭐?"

"저는 약하지 않아요."

 

라비의 눈이 일렁였다. 어젯밤 보았던 라비의 눈동자처럼. 누이의 빛줄기에 너덜너덜 찢겨나간 라비의 피부가 검게 물들었다. 누이는 가만히 손을 뻗었다. 라비는 주먹을 다시 고쳐잡으며 반격할 틈을 보았다.

 

"그 모습을 보니까 드디어 알 것 같아요. 그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누이의 말이 조금 더 빨랐다. 라비는 힘껏 뻗던 주먹을 중간에 멈춰버렸다.

 

"해와 달 이야기, 기억하시나요?"

"무슨…!!"

 

라비의 눈동자가 심하게 떨렸다. 누이의 손은 어느새 라비의 볼에 닿았다. 

 

"오라비와 바꾸어 해가 되었다."

"닥쳐!!"

 

라비가 서둘러 몸을 움직이려 했으나 빛의 구가 라비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빛이 모인 곳에는 반드시 어둠이 존재한다. 피하고 싶어도 도망갈 수 없는 감옥처럼.

 

"저 때문에…… 오라버니였어요."

 

누이의 손가락이 라비의 볼을 가만히 쓸었다.

 

"저 때문에…… 제가 미리 알았더라면… 오라버니가 이렇게 약한 사람인 줄 미리 알았더라면 지금 이런 모습을 막을 수 있었을거에요……"

 

어머니와의 대화, 언젠가 느꼈던 감정, 그때 했던 말은 전부 라비에게 향하고 있다. 누이는 뿌옇던 안개가 걷히고 드러난 그것을 라비에게 쏟아냈다. 두 손을 뻗어 라비의 얼굴을 감싸며.

 

"오라버니, 오라버니는 저와 '바꾸어' 어둠이 되어야 해요. 제발 돌아오세요."

 

라비는 미칠 것 같았다. 아니, 제정신을 찾는 것인지도 몰랐다. 어느쪽이어도 누이의 이 말과 행동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자신을 똑바로 마주하는, 너무나 달라진 동생에게서.

 

"네…가…뭘 안다고…! 그런 운명이…!!"

"오라버니와 저를 헤어지게 하죠. 하지만 다시 만나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어둠과 빛을 반복하며 우리는 함께할 거에요."

 

누이는 빛으로 가득찬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그것이 우리의 운명이에요."

 

라비의 앞에 서 있는 자는 산신의 힘을 물려받아 해가 된 자였다. 라비의 기억 속 누이는 라비가 운명에서 도망치며 사라졌다. 어둠이 도망쳤기에 드디어 해의 힘이 온전히 누이의 것이 되었다. 

라비는 알 수 없었다. 그때도, 지금도. 구원을 바라고 도망쳤기에 여기, 이 빛 앞에 도달했다는 것을.

 

"돌아가요. 저와 계속 함께……"

 

완성되지 않는 이야기 속에서 이별을 반복하며, 영원히. 

 

"으, 아, 아아……!!!"

 

라비는 이윽고 울부짖으며 어둠을 뿜어냈다.




"자, 누이의 승리를 축하하며!"

"고마워 신디."

 

누이가 웃으며 아이스크림을 받아들었다. 달콤한 복숭아 향기가 감돌았다. 이내 한 입 베어무니 차갑게 녹아내렸다.

 

"그런데 경기 중간에 카메라가 엄청 빛나더라. 완전 새하얘져서 아무것도 안 보이더라니까? 그래서 엄청 걱정했잖아."

"...태양의 힘이 너무 강해서 그런 걸지도."

 

누이는 또다시 자신에게서 빠져나간 라비를 떠올렸다. 볼프강만 아니었으면, 아니 이 경기가 아니었으면 정신을 놓을 듯 울부짖던 라비를 두고 떠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래도 다음 기회가 있잖아."

"뭐? 이겼는데 벌써 다음 경기를 생각하는 거야? 너도 참 대단하다."

 

누이는 방긋 웃으며 아이스크림을 핥았다. 감정의 이름을 확실히 알았으니 이제 곧게 뻗어갈 일만 남았다. 목적지가 멀지 않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오라비와 바꾸어 해가 되었다. 그것이 라비와 누이의 운명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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